warm.unspoken

관계의결 인간도감

Human Archive Editions

Rider — Portrait Layer

The Fool덜 챙긴 채 나가는 사람

인물편 · 人物篇 · Portrait

가방을 다 못 싸고 그냥 나왔다. 나가고 나서야 빠진 걸 안다.

인간의 초상

현관에 반쯤 싸다 만 가방이 놓여 있다. 전날 밤에 열어두고 그대로 잠들었고, 아침에는 제대로 챙기지 않은 채 그냥 들고 나온다.

신발 끈을 묶는 동안 문은 열어둔다. 닫고 묶으면 한 번 더 열어야 하고, 그 한 번이 늘 길어진다.

핵심 성향

많이 들고 나가는 편이 아니다. 가방을 싸다 보면 넣었던 걸 다시 꺼낸다. 챙겨야 할 걸 적어놓고도, 나갈 때는 늘 조금 덜 들고 나간다.

빠진 건 가서 사거나 빌리면 된다고 넘겨버린다.

지도를 켜두고도 중간에 끈다. 길을 알아서 끄는 건 아니다. 걷다 보면 어떻게든 나오겠지 싶다.

막다른 데까지 갔다가 돌아나오고, 아까 지나친 가게 앞을 다시 지나기도 한다.

핵심 장면 5

  1. 아침에 제대로 챙기지 않은 채 그냥 가방을 들고 나온다.
  2. 출발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도착한 뒤에 사진 한 장을 보낸다.
  3. 지도를 껐다가 골목 끝에서 되돌아 나온다.
  4. 이사한 집에 박스 두 개가 넉 달째 그대로 있다.
  5. 헤어진 뒤 상대의 물건을 챙기지 않고 자기 것만 들고 나온다.

In Relationships

이 사람이 지나간 뒤에는 애매하게 남은 말이 있다. 끝난 건지, 아직 남은 건지 바로 정리가 안 된다.

남은 사람은 한동안 그 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른다.

인간도감의 기록

짐이 가벼운 사람으로 기억되지만, 실제로 가벼운 것은 들고 간 것뿐이다. 두고 온 것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인간도감은 이 사람의 출발을 기록하지 않는다. 출발 다음날 그 방에 남은 것들을 기록한다.

이해편 · 理解篇 · Understanding

넉 달째 박스를 열지 않는 사람

이사가 끝난 방에 한 번도 열지 않은 박스가 남아 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대충 안다. 모르는 박스는 아니다. 급한 것부터 꺼내다 보면 급하지 않은 것들만 남는다.

남은 것들은 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속 그 자리에 있다. 오늘 안 열어도 크게 문제는 없다. 내일 열어도 되고, 다음 주에 열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한 박스가 몇 달을 간다.

다음 집으로 옮길 때도 그 박스는 그대로 실린다. 테이프를 새로 붙일 것도 없다. 이미 닫혀 있으니까. 새 방 구석에 놓이고, 거기서 또 몇 달을 보낸다.

그러다 새 박스가 하나 더 생긴다. 이번에는 다른 물건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모양은 비슷하다. 급하지 않아서 밀린 것들, 당장 없어도 사는 데 문제는 없는 것들, 열면 어딘가에 자리를 만들어줘야 하는 것들이다.

관계에서도 비슷하다. 말하지 않고 넘어간 일이 하나씩 같은 박스에 들어간다. 그때는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는 말처럼 보인다. 지금 말하면 길어질 것 같고, 지나가면 없어질 것 같고, 굳이 이름 붙이면 일이 될 것 같아서 그냥 둔다.

그런데 둔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 새로 만난 사람 앞에서 갑자기 오래된 말이 먼저 걸리는 날이 있다.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생기고, 상대는 자기가 뭘 건드렸는지 모른다.

대화가 길어지면 잠깐 걷고 오겠다는 말이 나온다. 화가 나서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문을 세게 닫지도 않는다. 그냥 숨 좀 돌리고 오겠다고 한다.

그 말이 나오면, 보통 이미 열지 않은 게 하나 있다. 그 자리에서 꺼내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일단 몸만 먼저 빠져나간다.

그 박스 위에 하나씩 올려두던 것은 무엇이었나.

넉 달째 박스를 열지 않는 사람 — warm.unspoken.

질문편 · 質問篇 · Question

덜 챙긴 채 나가는 날

가방을 다 싸고 나가야만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다 챙기려고 하면 못 나갈 때가 있다. 하나 더 넣고, 다시 빼고, 혹시 몰라서 다시 열어보고, 그러다 출발이 자꾸 늦어진다.

그래서 덜 챙긴 상태가 더 편할 때가 있다. 빠진 것이 있으면 가서 사거나 빌리면 된다고 넘겨버린다. 빈손에 가까울수록 발이 빨리 떨어진다.

문제는 빠진 것이 늘 물건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말하지 않은 것, 확인하지 않은 것, 정리하지 않은 마음도 같이 남는다. 몸은 나갔는데 방 안에 아직 놓인 것들이 있다.

열지 않은 박스

이사한 집에 열지 않은 박스가 남아 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열면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어디에 둘지 정해야 하고, 필요 없는 건 버려야 한다.

그래서 박스는 닫힌 채로 오래 간다. 닫혀 있으면 아직 정하지 않아도 된다. 필요한지 아닌지, 버릴지 둘지, 다시 꺼낼지 말지 정하지 않아도 된다.

관계에서도 비슷한 박스가 생긴다. 말하지 않고 지나간 일들이 그 안에 들어간다. 한 번은 괜찮다. 두 번도 지나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박스가 방의 일부처럼 보인다.

잠깐 걷고 온다는 말

대화가 길어질 때 잠깐 걷고 오겠다는 말이 나오는 날이 있다. 그 말은 싸우자는 말도 아니고 끝내자는 말도 아니다. 그래서 남은 사람은 더 애매해진다.

기다려야 하는지, 따라가야 하는지, 묻지 말아야 하는지 모른다.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돌아온 뒤에는 아까 하던 말의 중간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 사이에 무엇이 빠졌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빠진 말은 그 자리에 남고, 사람만 한 바퀴 돌고 온다.

두고 온 것

이 사람은 짐이 가벼운 사람으로 기억된다. 어디든 쉽게 가는 사람, 복잡하게 붙잡지 않는 사람, 훌쩍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가벼운 것은 들고 간 것뿐이다. 두고 온 것은 그대로 남아 있다. 방에도 남고, 박스에도 남고, 어떤 사람에게도 남는다.

끝난 뒤에 남은 사람은 묻게 된다. 이게 정말 끝난 건지, 잠깐 나간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두고 가는 사람인 건지.

다시 열어본 날

언젠가는 두고 온 것 중 하나를 다시 보러 간다. 대단한 결심을 하고 돌아가는 건 아니다. 그냥 어느 날, 계속 마음에 걸리던 박스 하나를 연다.

열어보면 생각보다 별것 아닌 것도 있고,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버릴 수 있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다시 챙기고, 어떤 것은 그 자리에서 내려놓는다.

그날 이후에도 이 사람은 여전히 가볍게 나간다. 다만 한 번씩은 돌아와서 확인한다. 계속 같은 박스를 들고 이사하지는 않게 된다.

질문들

다 챙겨야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긴 날이 있었나.

덜 챙긴 채 나선 날, 무엇이 더 빨리 시작됐나.

열지 않고 다음 집까지 들고 간 박스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나.

그 박스는 열면 무엇을 정해야 해서 미뤄두었나.

내가 잠깐 걷고 오겠다고 말한 자리에는 어떤 말이 남아 있었나.

가볍게 떠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두고 온 것은 무엇이었나.

가방을 챙기는 동안 열지 않은 박스 쪽은 몇 번이나 봤나.

인물편 · 人物篇 · Portrait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해편 · 理解篇 · Understanding
왜 그런 사람인가
질문편 · 質問篇 · Question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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